끌림/이병률
끌림
이병률 저 |
끌림 / 이병률
사랑해라, 시간이 없다
사랑을 자꾸 벽에다가 걸어두지만 말고 만지고, 입고 그리고 얼굴에 문대라
사랑은 기다려주지 않으며
내릴 곳을 몰라 종점까지 가게 된다 할지라도 아무 보상이 없으며
오히려 핑계를 준비하는 당신에게 책임을 물을 것이다
사랑해라, 정각에 도착한 그 사랑에 늦으면 안 된다
사랑은 그런 의미에서 기차다
함께 타지 않으면 같은 풍경을 나란히 볼 수 없는 것
나란히 표를 끊지 않으면 따로 앉을 수 밖에 없는 것
서로 마음을 확인하지 않았다면 같은 역에 내릴 수도 없는 것
그 후로 영원히 영영 어긋나고 마는 것
만약 당신이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세상을 이해하는 법을,
우주를 바라보는 방법을 익히게 될 것이다
그러다 어쩌면, 세상을 껴안다가 문득 그를 껴안고
당신 자신을 껴안는 착각이 들기도 할 것이다
그 기분에 울컥해해지기도 할 것이다
그렇게 사랑은 아무 준비가 돼 있지 않은 당신에게 많은 걸 쏟아놓을 것이다
한 사람과 한 사람이 만나 세상을 원하는 색으로 물들이는 기적을
당신은 두 눈으로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열정'이라는 말
열정이란 말에는 한 철 태양이 머물다 지나간 들판의 냄새가 있고,
이른 새벽 푸석푸석한 이마를 쓸어올리며 무언가를 끼적이는 청년의 눈빛이 스며 있고,
언제인지 모르지만 언젠가는 타고 떠날 수 있는 보너스 항공권 한 장에 들어 있는 울렁거림이 있다.
열정은 그런 것이다.
그걸 모르면 숨이 막힐 것 같은 어둠에 놓여 있는 상태가 되고,
그걸 갖지 아니하면 신발을 신지 않은 채 낯선 도시에 떨어진 그 암담함과 다르지 않다.
사랑의 열정이 그러했고 청춘의 열정이 그러했고
먼 곳을 향한 열정이 그러했듯
가지고 있는 자와 가지고 있지 않은 자가 확연히 구분되는 그런 것.
이를테면 열정은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건넌 자와 건너지 않은 자로 비유되고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강물에 몸을 던져 물살을 타고 먼 길을 떠난 자와 아직 채 강물에 발을 담그지 않은 자,
그 둘로 비유된다.
열정은 건너는 것이 아니라, 몸을 맡겨 흐르는 것이다.
"뒤"
누구든 떠나는 순간이 되면 본능에 가까울 정도로 뒤를 돌아보게 된다.
발걸음을 멈춰서서 자주 뒤를 돌아다본다
그건 내가 앞을 향하면서 봤던 풍경들하고 전혀 다른 느낌을,
풍경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보고 지나온 것이 저거였구나 하는 단순한 문제를 뛰어 넘는다..
아예 멈춰 선 채로 멍해져서
그 자리에 주저앉는 일도 생겨버리기 때문이다..
내가 뒤돌지 않았다면
그것은 그냥 뒤로 묻힐 뿐인 것이 돼버린다
아예 아무것도 아닌게 되버린다
내가 뒤척이지 않으면,
나늘 뒤집어 놓지 않으면
삶의 다른 국면은 나에게 찾아와주지 않는다
어쩌면 중요한 것들 모두는 뒤에 있는 지도 모른다.
"누구에게나 아름다운 시간은 있어"
누구에게나 아름다운 시간은 있어.
당신에게도 나에게도, 새에게도, 나무에게도 누구에게나
아름다운 시간은 있는 법이지.
기억하고, 추억하고, 감싸 안는 일,
그래서 힘이 되고 기운이 되고 빛이 되는 일.
손에서 놓친 줄만 알았는데
잘 감췄다고 믿었는데
가슴에 다시 잡히고 마는..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운 시간이어서
온 몸에 레몬즙이 퍼지는 것 같은.